메르켈 리더십, 합의에 이르는 힘 - 케이터 마튼
...메르켈은 과장된 수사를 거부하고 거창한 아이디어, 원대한 내용을 담은 문장은 모조리 터부시했다. 화염 같은 선동으로 대중을 갖고 노는 것보다는 서방국가의 지루하지만 현명한 관리인이 되는 쪽을 선호했다...
내가 세계 리딩 국가의 지도자들을 함부로 평가할 깜냥이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호감을 느끼고 관심을 갖게 하는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느껴지는 인물이 앙겔라 메르켈이다.
오바마는 합리적으로 보여지나 지나치게 리버럴을 강조한 탓에 정치적 올바름(PC)의 가치를 최우선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듯 느껴졌고, EU 주요국의 다른 정상들에 대해서도 어떠한 인상을 받아본적은 없다. 좀 더 세련되고 유려한 표현을 활용하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 밖에는.
메르켈 총리는, 좀 다른 인상을 풍겼다. 자주 접하진 않았지만, TV를 통해 볼때마다 그녀에게서는 카메라 앞에서 의례 보이는 정치인들의 미소도 없었고, 과장되거나 화려한 수사도 없었다. (물론 버벅거리거나 당황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순전히 메르켈 체제의 공이라고만 할수 없겠지만, 독일은 EU를 리딩하는 국가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의 발언과 의사 결정에 따른 전세계로의 영향력과 파급력은 대단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 책은 메르켈의 일대를 보여준다. 총리 재임시절 동안 발생한 헤프닝들이 많이 포함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녀의 성품답게 메르켈 개인에만 집중했다. 흔히들 메르켈 총리의 특징으로 동독출신, 여성, 과학자를 꼽곤 하는데 '동독출신'에 내포된 의미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는데 푸틴과의 관계를 설명한 부분에서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35년간 '경찰국가'에서 살아온 경험은, 현재 메르켈 가치관의 근간을 이루고 있을 것이며 '경찰'역할을 수행한 러시아-당시에는 소련-의 특성에 어색해 하거나 주눅들지 않고 습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역병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의 총리 재임 마지막 시절 직면한 위기 대처 방식이였다.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독일 국민들에게 자유를 제한하는 발표를 하면서 보여준 연설은 그가 지닌 가치를 유지하며 품격을 잃지 않은 것이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런 결정이 쉽게 내려져서는 안 됩니다. 결정되더라도 일시적으로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결정은 많은 인명을 구하는데 필수적입니다. ... 우리가 상대와 거리를 두는 것은 그들을 배려한다는 표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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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메르켈만큼 맹렬하게 지켜온 지도자는 없다. 그는 독일을 유럽의 리더-경제적 리더뿐 아니라 도덕적리더-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중동 난민 100만 명을 포용하면서 이민자의나라로 변신시켰다.
그는 지도자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거듭해서 실제로 증명했다.
메르켈은 역사의 궤적이 반드시 정의로운 방향으로 휘어져 나간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행동의 추진력으로 삼는 낙관론자다.
권력(power) 그 자체는 전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권력은 필요합니다. 권력은 '만드는 것(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무신 일을 하고 싶다면 적절한 도구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집단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 권력의 반대말은 무력함(powerless)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는건 그 순간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어떤 느낌이였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희열은 지속 가능한 감정이 아니다. 현실은 40년간 그토록 바라던 자유와 소독에 품은 로망과는 달랐다. 복종하고 불신하며 궁핍하게 생활하고 개인의 진취성을 잃는 습관은 쉽사리 버릴 수 없었다. 사소한 배신 행위와 심각한 배신 행위는 그들의 양심에 흠집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의 속도는 어지러울 정도였다. 때로는 심란히기도 했다. ...장벽이 무너졌을 때 경력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열 살쯤 나이가 많지만 은퇴하기에는 열 살쯤 젊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거죠. 그들은 '패잔병'이였습니다.
그는 성차별주의에 맞서서 휘두르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다른 이들이 따를 수 있는 자극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쟁점에 대해 대중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권한에 무턱대고 의지하지 않는 것이 리더십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이다.
"침착함 속에 힘이 있다"
메르켈이 보기에 대중을 흥분시키는 재능은 위험하다. 언어는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다. 말은 조심스럽게 활용해야 하는 무기다.
감정보다는 사실을 더 신뢰했고, 신분보다는 직무로서 정치를 대하는 탈인격화 한 정치를 선호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 앞을 쓸면 마을 전체가 깨끗해질 겁니다. 메르켈은 때때로 괴테의 말을 인용하며 이런 말을 했다.
고착되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변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일 일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보장된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평화, 번영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느낀 충동이 아니라 품은 가치들 옆에 굳건히 서십시요
메르켈은 '내면에 세운 장벽'이 무너지는 시간은 콘크리트 장벽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건 지나치게 실용적인 관점이다. 지극히 합리적인 과학자는 인간 행동의 배후에 존재하는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약간 깃들어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시구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비한 힘은 결과물이 있을 때에만 오래가는 법이죠'
협상은 참을성을 시험대에 올리는 고된 과정이다. 즉각적인 관심과 칭찬을 좇는 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일이다.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기를 바라는지 묻는 질문에 앙겔라 메르켈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노력했다(She treid)" 선동 정치가 판치는 시대에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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