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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개인주의자 선언

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석

이 책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솔직히 난 어떤 특별한 data에 기반하지 않고 저자의 경험과 사고를 풀어내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다'라기 보다는 쉽게 공감이 되어서 몰입하게 되질 않는다.  책과의 궁합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연유로 아무리 베스트 셀러 상위 순위에 오랜 기간을 머물러 있더라도 쉽게 집어들지 않는 편이다. (가뜩이나 책 잘 안 읽는데, 별로 맘에 안내키는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이 책-개인주의자 선언-을 고를때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블로그에서 발췌해서 본 문장들은 내 기호에 무척 와닿는 것들이였으나 혹시나 그게 전부일까봐 고민을 하다가 결국 e-book으로 보는 것으로 타협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참으로 줄 긋고 남겨놓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반성할 부분도 많고.

요즘들어 친밀함을 주창하는 격의 없는 인간관계 보다는 드라이한 관계가 불필요하고도 소모적으로 발생되는 일들을 줄이는 데 기여를 하고, 이게 다시 인간관계를 통해서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드라이한 인간관계라는 것은 결국 저자가 말하는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관계가 아닌가  싶다.

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 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현대의 합리적 개인은 자신의 비합리성까지도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로 전락하여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마저 저해할 뿐이다. 자기 이익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보하고 타협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합리성이다.

합리적인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사실, 내 주변의 대부분(또래건, 윗세대건)은 개인주의를 일부 인정하지만 지금 환경과 부적합하다던가, 스스로가 개인주의를 존중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역시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협소한 상식'에 갇혀 있는 탓에 타인을 이해는 능력이 부족하고 이 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협소한 상식에만 갇혀있는 인간은 비상식의 시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 실패하기 십상이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의 감성적 직관적 측면이 거대한 코끼리라면 이성적 측면은 거기 올라탄 작은 기수라고 비유한다.  코끼리와 기수의 의견이 불일치할 때면 언제나 코끼리가 이긴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코끼리가 훨씬 강력한 엔진이고 합리적인 기수는 보조적인 제어 장치 역할을 한다.  실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코끼리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 슬쩍 다른 길로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창하고 근본적인 해결책만 고집하지 않고 당장 개선가능한 작은 방법들을 바로 적용했고, 작지만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켰다

"냉소적으로 구는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영미식의 실용주의 가치관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전제아래 해야 할 의무를 다 이행했다면 과감하게 면책한다.  결과가 아무리 중대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지게하는 사회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인용은 그만하고,
이 책을 통해 내 나름의 결론은,
개인주의자가 되기 위한 근간은 타인에 대한 이해이다. 타인의 이해를 근간으로 각 개인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연대를 이룰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선생의 글이다.


(1/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