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역사 - 브누아 시마
주종을 가리지 않고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인데, 와인은 좀 특별하다.
저녁식사에 고기 반찬이 나올때마다 한두 잔씩 곁들이기에는 와인만 한 것도 없다. 소주는 왠지 집에서 먹기에 처량맞고, 맥주는 배가 부르며 취기도 낮고, 양주를 포함한 독주는 너무 비싸다. 와인은 일단
입에서 거북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마시다 보면 넘치지 않게 흥겹고(와인만 먹었을 경우), 한겨울엔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몸이 따뜻해졌음을 느끼게 한다.
한때 와인에 대해 폼 좀 잡아보겠다고, 이 책 저 책 들여다 보고 나름 비싼 와인들을 눈여겨 두었다가 사곤 했는데. 이제는 1~2만원대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선호하게 되었다. 물론 비쌀수록 맛있는 와인을 접할 확률이 높지만, 최소 십만원 근처에 가는 와인을 접했을 때나 그 차이를 느끼고, 그 이하 와인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만 한 혀가 아니다 보니 요새는 저가의 와인을 이것 저것 맛보다가, 입에 맞는다 싶으면 대량 구매를 한다. 저녁식사에 수만원짜리 와인을 매번 마시는 사치를 부릴만한 재력이 아니기에...
암튼, 나름 와인 애호가라 자평하는데 서점에서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와인의 품종이 어떻니, 지역별 맛의 차이가 어떻니, 에티켓이라던지 이런 내용은 하나도 없고, 제목 그대로 와인의 역사에 대해서 풀어냈다.(그것도 만화!!)
항상 책을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의 실체를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변화는 한순간에 발생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변화는 압력에 의해서 야기되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압력은 점진적으로 축적의 결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저 와인 산업이 꽤 큰 시장을 차지하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와인은 실제 기원전 부터 역사를 좌지우지 할 정도의 큰 산업이였고, 오랜 기간 동안 시대를 대표하는 거래 상품이였다.(물론 지금도 와인 산업은 엄청 크지만, 상대적으로 IT 제품같은 다른 것들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18세기까지 카톨릭 수도원들의 가장 주된 사업이 포도 재배를 통한 와인 생산 이였고, 중요 포도 자원을 차지하는 것이 권력을 확보/유지하는데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또 하나 막연하게 생각했던 점은,
와인은 처음 부터 생산된 원액과 생산지 고유의 브랜드 가치를 가졌을 거라 생각했었다. 물론 어느 지역 어느 곳에서 생산된 와인 상품이라는 개념은 있었으나, 여러가지 술이랄지 꿀같은 것들을 혼합해서 먹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좋은 포도를 생산하여 훌륭한 와인을 만들어 보아도 와인 자체에 대한 브랜드 개념 보다는 뭐랄까 좋은 과수원 브랜드 개념이 지배했던 것 같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은 '와인 유리병+코르크 마개' 조합이 발명되기 전까지 와인은 유통기한이 존재하는 음식과 다를 바 없었다.
포도원에서 생산된 와인은 커다란 술통에 밀봉되어 보관 될 수 있었으나 소비자들은 밀봉할 수 없는 술병이나 술단지에 담아 와인을 즐길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좋은 포도와 기술로 만든 와인이라도 공기를 차단한 상태로 오래 보관할 수 없었기에 공기 접촉에 의한 산화로 맛이 변질되는 단점이 있었다. 즉, 와인 생산 이후 도매를 거쳐 소비자에게 넘어 오면서 와인 고유의 가치를 지속 유지할 수 없다 보니 개별적 와인의 가치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와인의 숙성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사고 속에 싹틀 수 없었고 산업 확장에 한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17세기 말 유리병의 발명과 코르크 마개의 발견(플러스 나사형 코르크 마개 따개)으로 와인을 장기간 오래 맛의 변함없이 보관하고 숙성까지 가능하게 됨으로써 한계를 극복하게 되었는데.
이 대단한(?) 발견으로 사람들은 점차 숙성된 와인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단순 실물 거래 중심에서 숙성을 고려한 고급 와인에 대한 장기 투자까지 금융의 개념이 들어간 산업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시작된 포도의 전파는 비단길을 통해 인도, 중국을 거쳐 아시아 끝단인 일본까지 전파되었으나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에서는 양조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기후 탓, 전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문화적 차이점 등 다양한 배경이 있었겠으나, 와인을 통해 서구 유럽은 엄청난 상업적 교류와 이문을 남기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역사적 발전이 이뤄진 점을 봤을때 조선 혹은 훨씬 더 이전 시점에라도 한반도에서 와인을 주조하여 전 세계적 와인 무역 흐름에 자연스레 합류하였다면, 그래서 좀 더 이른 시기에 서구 세계와의 교류가 점진적으로 확산 되었다면 어떤 형태의 역사가 전개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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