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James & GH's Dad 2025. 1. 23. 09:17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 무라카미 하루키


사진과 고품질의 종이들로 구성된 책.
이건 대놓고,
'위스키 세계란 이렇게 멋진 세상이야. 이걸 모른 체 인생의 즐거움을 논할 수 없어' 라며 위스키의 세계로 들어오라 손짓하며 유혹하는 책이다.

특히, 책에 담겨진 증류소 주변의 (바다내음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하게 만드는) 풍경 사진들과 무심한 듯 쌓여 있는 캐스크들을 보며
위스키란, 사람이 만드는, 보리를 활용한 화학 작용의 결과물이 아니라 (마치 사진만으로도 바다 내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청량감을 주는 풍경과 바람, 풍요로운 자연이 만들어 내는 것이거나 현대 세상과는 살짝 동떨어진 마치 고대의 마법 세계의 전유물이 인간 세계에 남겨진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서문)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적어도 나는-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하고.

(p21) 그처럼 고약한 계절에도, 이 외진 섬(아일레이)에 일부러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다. 그들은 홀로 섬을 찾아와서는, 작은 코티지를 빌려 몇 주일 동안 누구의 방해도 받는 일 없이 조용히 책을 읽는다. 난로에 향이 좋은 이탄을 지피고 비발디의 테이프를 은은하게 틀어 놓는다. 질 좋은 위스키와 잔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전화선은 뽑아버린다.....궂은 계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기꺼이 즐기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여행법은 너무나도 영국인다운, 인생을 즐기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순간은 생각만해도 너무 멋져보인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형태의 여행을 가보고 싶다. 물론 여행내내 이럴 순 없겠지만)

(p43) 술마다 모두 제각기 삶의 방식이 있고 철학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메이커든 '뭐 대충 이정도면 되겠지'하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제각기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증류소마다 나름대로의 증류 레시피를 가지고 있다. 레시피란 요컨대 삶의 방식이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대한 가치 기준과도 같은 것이다. 무언가를 버리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p54) "생굴에다 싱글 몰트를 끼얹어 먹으면 맛이 기가 막혀"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게 바로 이 섬사람들이 굴을 먹는 독특한 방식이야. 한번 먹어보면 도저히 잊을 수가 없지"

(p72) "(좋은 보리, 물, 이탄) 그것만으로는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설명할 수 없어. 그 매력을 해명할 수가 없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지, 무리카미씨, 가장 나중에 오는 건 사람이야. 섬사람들의 퍼스낼리티와 생활양식이 이 맛을 만들어내는 거지. 그게 가장 중요해"

(P118) 술이라는 건 그게 어떤 술이든 산지에서 마셔야 가장 제맛이 나는 것 같다. 그 술이 만들어진 장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다. 산지에서 멀어질수록 그 술을 구성하고 있는 무언가가 조금씩 바래지는 듯 한 느낌이 든다.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 술이 일상적인 실감으로 조성되어 음용되는 환경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거기에 들어있는 향이 미묘하게 어쩌면 심리적으로 변질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위스키를 마시면서 내가 늘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저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 풍경이다. 내게 있어서 싱글 몰트의 맛은 그 풍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바다에서 부는 거센 바람이 파릇파릇한  풀섶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언덕을 뛰어오른다. 난로에는 이탄이 부드러운 오렌지 빛깔을 내며 타고 있다. 알록달록 산뜻한 빛깔을 띤 지붕마다 흰 갈매기가 한 마리씩 내려앉아 있다. 그러한 풍경과 결부되면서, 술은 내 안에서 본연의 향을 생생하게 되찾아간다.  ...내 손 안에 쥐어진 술잔 속에서 위스키는 조용히 미소 짓기 시작한다.

여행이라는 건 참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사람의 마음속에만 남는 것, 그렇기에 더욱 귀중한 것을 여행은 우리에게 안겨준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해도, 한참이 지나깨닫게 되는 것을.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애써 여행 같은 걸 한단 말인가?



위스키를 포함한 기호가 뚜렷한 술들은, 고액의 가격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닌 하루키의 글처럼 술을 만드는 사람들의 생활 양식과 환경을 맛보는게 아닐까? 술 한잔을 바라보며 마시는 시간 속에서 뭔가 특별함 호사로운 분위기와 이런 기호를 즐기고 있는 스스로를 대견해 하며 흐뭇해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것을 지속해서 느끼고자 어떤 매니악적 모습이 나오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